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빈곤을 단지 비극적인 삶의 단면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동태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

빈곤은 통계에 있고, 뉴스에 있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에 있고, 후진국에 있지, 주변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장학생 선발을 하다 보면 다수의 학생들이 의식주가 곤궁하고 질병으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서만큼은 벗어나들 있는 것 같아, 도움을 받아야 할 빈곤한 학생이 과연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한국 사회가 발전을 거듭한 끝에 구성원들 대부분이 생계와 생존의 공포를 의미하는 빈곤에서는 탈피하였다는 서사는 신화가 아니라 팩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잊을 만하면 복지 사각지대에서 비극을 겪는 가족들, 무연고 사망자들, 쪽방촌의 여름과 겨울 같은 소식들이 보도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도 드물기 때문에 ‘뉴스’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2022년 출간된 『빈곤 과정』의 저자인 조문영 교수는 20년 넘게 빈곤이라는 주제를 갖고 씨름한 인류학자이다. 『빈곤 과정』에서는 현상으로서의 ‘가난’이 사회 문제로서의 ‘빈곤’으로 탐색되고 개인과 집단이 빈곤해지는 과정, 빈곤이 관리되는 체계, 빈곤이 소비되는 절차 등을 인류학적으로 스케치한다. ‘빈곤’이란 도시 빈민, 공장 노동자, 수급자, 불안한 청년, 이주민 등 다양한 계층으로 확대‧재생산되고, 국가의 빈곤 통치와 빈곤 사업을 통해서 관리되는 지난한 과정으로서 국경과 시대를 막론하고 변용되고 재구성되고 있다. 한때 빈곤포르노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기부가 필요한 대상의 경제적‧사회적 취약함을 최대한 드라마화하고 시각화하여 기부자들의 심경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지칭쯤으로 이해된다. 조문영 교수의 『빈곤과정』을 읽고 나면 어쩌다 빈곤포르노를 만나더라도 그 사연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기준으로 평가하고 소비하는 것만큼은 벗어날 수 있다. 『빈곤 과정』은 빈곤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미지 출처: flaticon.com

 

이 책의 1, 2장에서는 기초생활보장법과 수급제도 등 복지제도 속에서 빈곤이 어떻게 정의되고 관리되는지를 소개한다. 3, 4장에서는 중국 선전(深圳)과 하얼빈(哈尔滨) 지역의 공장노동자와 농민공으로 살아가는 두 여성의 삶을 문화기술지적으로 서술하면서 빈곤 과정의 지역적 경계를 확장한다. 5, 6장에서는 젊은 세대에 대한 ‘N포 세대’와 같은 불안·체념·부정의 명명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 새로운 지식, 아이디어, 정동(affect)을 창출해내는 ‘프런티어’로 거듭나게 하는 21세기 빈곤 통치와 빈곤 산업을 분석한다. 7장에서는 중국 선양(沈阳)의 한인타운에서 빈곤에 대한 불안을 경험하면서 하향적 계층 이동을 두려워하는 한국인 이주자들과 조선족들의 삶을 기술하고, 8장에서는 저자가 수업 과정에서 지켜본 청년층과 도시 빈민의 빈곤에 관한 인식과 경험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9장에서는 시야를 넓혀 인간이라는 지구 생활 파괴자의 한계를 지적하고 다른 존재들과의 동거를 제안한다.

저자는 20년 이상 빈곤 연구를 진행해 오면서도 계속해서 현재적 문제의식을 소환해서 살을 붙여나가는 긴장감과 감수성을 잃지 않는다. 그 덕분에 『빈곤 과정』을 읽으면 글로벌 빈곤 사업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실존적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청년 세대와 빈곤 문제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이나, 비인간적 존재와 빈곤과의 관계로까지 ‘인류세’의 관점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시야를 접할 수가 있었다. 『빈곤 과정』을 다 읽고 나면 빈곤이 사회적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하며,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함께 견디며, 그럼에도 누구든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내-자리를 확보할 자격이 있음을 서로 배우는” 과정으로 정치화되어야 한다는 점만큼은 확실히 새길 수 있게 된다

김정연 |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상법, 금융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영리조직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관심이 많아서 몇 편의 연구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나눔북스 팬인데 벌써 두 번째 추천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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